얼어붙은 지갑은 ‘가성비 세단’으로, 가족 여행은 ‘대형 전기 SUV’로: 극과 극을 달리는 자동차 시장

요즘 자동차 시장의 흐름을 보면 꽤나 흥미로운 역전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차는 무조건 공간 넓은 SUV가 최고라는 공식이 진리처럼 통용됐지만, 경기 침체로 소비자들의 주머니 사정이 팍팍해지면서 판도가 묘하게 바뀌고 있는 것이다. 카이즈유데이터연구소 통계를 보면 올해 1분기 국내 세단 판매량은 10만 7,252대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16.6%나 껑충 뛰었다. 반면에 굳건할 줄 알았던 SUV 판매량은 오히려 1.6% 뒷걸음질 치며 20만 2,447대에 머물렀다.

이유는 단순하고 명확하다. 비싸서다. SUV는 기본적으로 덩치도 크고 험로 주행에 맞춘 부품들이 들어가다 보니 동급 세단보다 수백만 원은 더 비싸다. 결국 지갑이 얇아진 소비자들이 상대적으로 진입 장벽이 낮은 ‘가성비 세단’으로 눈길을 돌린 셈이다. 올 1분기 국내 판매 톱10만 봐도 그랜저(1만 9,031대, 4위), 아반떼(1만 8,909대, 5위), 쏘나타(1만 4,477대, 9위) 같은 터줏대감 3인방이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특히 아반떼와 쏘나타(중국산 택시 모델 출시 효과 포함)는 전년 대비 각각 56.2%, 81.4%라는 엄청난 판매 증가율을 보였다. 반면 제네시스 G80(-3.9%)이나 G90(-13.4%) 같은 고가 라인업의 판매가 줄어든 걸 보면, 지금 시장의 핵심 기조는 철저히 가성비에 맞춰져 있다.

수입차 시장도 분위기는 비슷하다. 벤츠가 내놓은 E클래스의 엔트리 모델 ‘E200’이 수입 세단 판매 1위(3,457대)를 차지했고, 테슬라는 아예 중국산 모델3 부분변경을 들여와 기존 미국산보다 가격을 1,000만 원 안팎으로 훅 낮춰버리면서 1분기 판매량을 작년 15대에서 올해 2,345대로 폭발시켰다. 게다가 전기차 시대로 넘어오면서 세단의 고질적인 약점이었던 비좁은 실내 공간 문제까지 꽤 해결됐다. 부품 수가 내연기관차보다 30% 정도 적다 보니 공간 확보가 수월해진 것이다. 무려 490리터의 트렁크를 뽑아내고 1회 충전으로 533km를 달리는 기아의 첫 준중형 전기 세단 EV4나, 4,750만 원이라는 매력적인 시작가로 모델3(5,199만 원)보다 450만 원가량 저렴하게 치고 들어온 BYD의 중형 전기 세단 ‘실(Seal)’의 등장은 이런 세단의 부활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이렇게 한편에서는 가성비와 실용성을 무기로 한 세단이 약진하고 있다면, 완전히 상반된 포지션에서는 하이엔드 패밀리 전기차들이 기술의 정점을 찍으며 대가족과 장거리 여행족의 지갑을 열게 만들고 있다. 최근 고속도로와 도심을 오가며 600km 넘게 직접 시승해 본 ‘2026년형 현대 아이오닉 9’이 그 완벽한 예시다. 가성비 세단이 팍팍한 현실의 도피처라면, 아이오닉 9은 많은 가족들이 그토록 기다려온 3열 전기 SUV의 완성형에 가깝다.

E-GMP 플랫폼을 기반으로 빚어낸 이 차의 실내 공간감과 시트 품질은 동급 최고 수준이거나 그에 필적한다. 바닥에 깔린 110.3kWh 크기의 거대한 NMC(니켈·망간·코발트) 배터리는 트림에 따라 EPA 기준 500~539km의 넉넉한 주행 거리를 제공한다. 3열까지 꽉 찬 탑승객을 위해 모든 자리에 100W USB-C 포트를 심어뒀고, 트렁크에는 1.5kW 110V 콘센트까지 마련해 둔 디테일은 실주행에서 꽤나 유용하다. 여기에 구독료 없는 탄탄한 운전자 보조 시스템(ADAS)과 2025년 IIHS 최고 안전 등급(TSP+)까지 챙겼다. 시작 가격은 북미 기준 5만 8,955달러(캐나다 59,999달러)에서 최고 7만 6,490달러(캐나다 81,499달러)로 형성되어 있는데, 총점 100점 만점에 81.25점을 줄 수 있을 만큼 기본기가 출중하다.

물론 아쉬운 구석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자체 통합 스트리밍 플랫폼 없이 블루투스에만 의존해야 하는 오디오나, 내비게이션에서 충전소를 일일이 수동으로 지정해야 하는 점은 최신 전기차치고는 올드하다. 시동을 켤 때나 후진 기어를 넣을 때마다 원페달 드라이빙 설정이 레벨 3로 초기화되는 것도 은근히 성가시다. 게다가 북미 시장 기준으로 GM의 비스틱(Vistiq)이나 리릭(Lyriq)은 이미 V2H(Vehicle-to-Home) 기능을 지원하는 반면, 아이오닉 9은 하드웨어 준비를 마치고도 아직 기능을 활성화하지 않아 경쟁에서 반 발짝 뒤처진 느낌을 준다. (앱 구동이 다소 느린 것도 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차의 압도적인 충전 성능은 자잘한 단점들을 잊게 만든다. NACS 포트가 적용된 이 녀석은 800V 네이티브 350kW급 충전기에 물리면 10%에서 80%까지 채우는 데 딱 24분이면 충분하다. 배터리가 60%나 차 있는 상태에서도 197.75kW의 전력을 빨아들이며 시승 중 최고 215kW의 피크 수치를 찍었는데, 비슷한 덩치의 사이버트럭과 비교해도 훨씬 나은 퍼포먼스다. 다만 주의할 점이 있다. 테슬라 슈퍼차저 같은 400V 충전소를 이용할 때는 차 내부의 모터와 인버터를 승압기로 쓰게 되는데, 이때는 최대 출력이 126kW 정도로 제한되어 같은 구간 충전에 40분가량이 소요된다. 최대 효율을 뽑아내려면 제대로 된 800V 충전 환경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결국 지금의 자동차 시장은 팍팍한 현실을 돌파하려는 합리적인 가성비 세단 수요와, 기술의 발전을 온전히 누리며 가족과의 여유를 즐기려는 고가의 대형 전기 SUV 수요로 뚜렷하게 나뉘고 있다. 어느 한쪽이 정답이라기보다는 각자의 생활 방식과 주머니 사정에 맞춘 극히 자연스러운 시장의 재편 과정일 것이다.